1. 논문을 내고 며칠 기절해 있다가 이제 실험을 다시 시작해볼까 하던 차에 한달 전쯤 신청했던 튀빙엔에서 하는 특별강좌가 그 다음주라는 걸 알고 부랴부랴 기차표랑 숙소를 예약하고 일주일 동안 다녀왔다. 이론 쪽에 부족한 게 많아서 그 부분은 즐겁게 들었지만 실험부분은 거의 다 아는 부분이라 좀 지루했다. 의사들이 꽤 많이 참가한 코스라 실험이 그랬던 듯...그치만 그들은 수업들을 때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는 걸;; 마지막 날에는 병원투어를 시켜줬는데 수술실에 들어가서 사람 수술하는 것도 구경했다 (사실은 이게 하이라이트였다고 생각하는 중;;). 유스호스텔에 머물렀는데 4인1실을 1~2명의 투숙객과 같이 썼다. 위층에서 애들이 뛰어다니고 같은 방 동양인 할머니가 코를 골며 주무시는 바람에 며칠 고생했지만, 창문을 열면 백조와 보트가 떠다니는 강이 보이는 점이나 깔끔했던 것 등등 전반적으로는 괜찮은 숙소라고 생각한다 (근데 유스호스텔은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란 말인가..나도 이미 막 젊은이는 아니게 되어가고 있지만 나이 제한은 없는 건가요?). 튀빙엔은 전반적으로 대학도시에 가까운 곳이라 괴팅엔이랑 비슷하지만 도심에 건물이 좀더 밀집되어 있고, 좀더 경관이 아름답고 날씨도 좋은 곳이었다. 수업이 끝난 금요일에는 호헨튀빙엔이라는 성에도 가봤는데, DNA를 최초로 분리한 실험을 여기서 했다고 한다. 토요일엔 키큰 나무들이 양쪽에 쭉 서있는 공원에서 햇살아래 각종 새소리를 들으며새똥폭탄을 맞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읽던 소설 한권을 끝냈다.
2. 르귄의 소설 네 권을 들고와서는 1년 반이 되도록 왠지 손이 안 가서 전공관련 된 글이 아니면 한글로 된 책만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튀빙엔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길고 짐도 무거워서 큰맘먹고 한 권을 골라서 갔는데 의외로 술술 읽혀서 놀랐다. 예전에 선배와 진행하던 사적인 번역 프로젝트 때 적합한 단어들을 찾느라고 고생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쩌면 그게 원어소설을 멀리하던 이유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친구의 소감으로는 르귄의 원어본을 볼 때 좀더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꽤 비슷하다고 느꼈다. 누군가는 르귄의 문체에서 치유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는데 나도 그래서 좋아하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을 주는 부분이 어투인지, 사건을 그려나가는 태도인지, 사건의 진행 방향인지, 아니면 모두 다인지 잘 모르겠고 분석할 생각도 해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삶에 종착역이랄까 그런 게 있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왔었는데,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삶은 담담하게 걸어가는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서는 안 될 것이나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건 사실 환상에 가깝고, 나는 언제나 원하지 않는 것에서 걸어나갈 수 있다고...
3.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부활절 휴가다. 사실은 수요일부터 휴일 분위기였지만. 금요일날은 실험실 동료 몇 명이랑 프로그램 동기, 아는 한국사람 몇 명, 인도인 실험실 동료가 불러온 인도인 15명과 함께 연구소 정원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다. 인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른 사람들이랑은 인사도 안하고 자기들끼리만 얘기하는 사태가 벌어져서 좀 맘에 안들었다. 거기에 낄 수 없었던 나머지 사람들끼리 놀았는데 그래도 나름 괜찮았던 듯. 얘기하다보니 우리 실험실 동료 중 하나가 인명구조원 자격이 있는 수영인(?)이더라! 아아, 못다배운 접영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줄기 희망을 갖게 하는 흐뭇한 순간이었다. 이래저래 맘에 안드는 구석도 있고, 특히 불판에 들어가는 숯이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서 동료가 집에 가서 숯을 가져와야 했던 일도 있었지만 순조롭게 돌아갔던 것 같다. 스테이크, 꼬치구이, 샐러드, 과자, 후식 등등 4시부터 9시까지 엄청나게 먹고 수다떨다가 끝났다. 왠지 왕수다를 떨고 싶은 날이었는데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것만 같은 아쉬움에 12시까지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동료 옆에 붙어앉아서 나불나불하다가 집에 들어왔다.
4. 독일에 온 이후로 이웃에 좀 예민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새집으로 온 이후에는 별 일은 없다. 단지 한 이웃이 밤일할 때 너무 크게 소리를 질러서 무슨 일 난 줄 알았던 것만 빼면. 우리 실험실 테크니션 아줌마한테 얘기했더니 귀엽게도 "나는 주변에 아무도 듣는 사람 없다는 게 확실할 때만 그러는데 걔 이상하다" 그러시는 거다. 아줌마 최고!
5. 논문 제출하기 전까지 거의 매일 실험실에 나오다시피 했더니 주말에 쉬는 게 너무 어색한 거다. 그래도 좀 쉬기는 해야된다며 일요일은 침대에 붙어앉아서 이미 본 미드를 돌려보며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 휴일의 마지막인 오늘은 인도인 동료와 금요일날 안굽고 남은 립을 점심으로 구워먹고 티라미수 케익 한판을 후식으로 끝장내고 인터넷을 몇 시간째 하고 이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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